Surviving as a Genius on Borrowed Time Chapter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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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깃발 (9)

* * *

입황성 외벽.

희고 푸른 의복들이 햇볕 아래에서 빛으로 번들거리는 질감을 드러낸다. 모두 천잠 혹은 비단 재질이라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벽로를 지키고 있는 자들의 무복인데, 하나같이 거칠 황 자가 매끄럽게 새겨져 있었다.

“보고.”

“이상 없습니다.”

외성에서 경계를 서는 고수들.

백색무인들이 십여 장 간격으로 띄엄띄엄 늘어선 형태다. 저마다 흰색으로 성곽에 꽂힌 황(荒) 자 깃발의 옆에서 성을 지키고 있다.

그 가운데 이따금 청색무인 한 명이 성벽로를 돌아다니며 경계조의 조장으로서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내렸다.

외성을 둘러싼 도시를 또다시 양양의 성채가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필요한 일이었다.

혹여 있을지 모를 무림 고수들의 침입을 방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도시 저잣거리에서 여령의 살수가 잡힌 이후로 외성 경계가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황량하구만.”

등 뒤로 창 한 자루를 패용한 명족 고수가 중얼거렸다.

본성에 머무는 입황성 무인들의 행색이 으레 그렇듯, 말끔하게 정리된 바짓단이 그의 발치에서 청빛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보령창(補靈槍) 위곤(魏琨).

현재 마광익에 속해 있는 사월궁귀 위예령의 동생으로, 그의 윗누이와 달리 입황성에서 율법을 집행하는 율령대 청색이다.

다른 무력대의 고수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신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율령대의 무인마저 외성 경계에 투입되어야 할 만큼 본성 전력이 크게 빠져나가 있는 까닭이었다.

일전에 들어온 마광익과 섬예 무맥마저 상당수가 다시금 임무를 나간 지 오래였다.

천하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흉년을 맞이한 각지의 무림인들이 강도와 마적, 혹은 폭급한 산신(山神)으로 돌변한 까닭에.

일각에서는 총채주 태백부왕(太白斧王)을 앞세운 녹림이나 북방에서 넘어온 요족 고수들 일부를 새로운 십삼천의 일좌로 꼽기도 했다.

“황량하다니. 본성 말입니까?”

옆쪽에서 경계를 지키던 백색무사 한 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내가기공의 고수들뿐인 자리다. 먼 거리에서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네도 대화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명족 고수들의 경우, 귀 뒤편 완골혈(完骨穴)을 진기로 채울 시 중앙 연무장의 검풍마저 듣는 게 가능하다.

위곤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그저 근시일 내에 치러질 신임 자색의 승단식이 떠올라서. 본래 양양의 저잣거리까지 풍악 소리가 닿을 만큼 성대해야 하지 않나. 심지어 검 한 자루만 차고 본성의 문을 두드린 소년이 삼 년도 채 되지 않아 백청흑자의 끝에 다다랐는데.”

“그야…….”

백색무사는 괜스레 허리춤의 검 손잡이만 툭툭 두드렸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자색 승단식과 같은 거창한 예식을 치를 만한 상황이 아님은 누구나 안다.

그때였다.

그들이 지키고 서 있던 성벽 너머의 관도에서 웬 아이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무사님!”

여덟 살쯤 될까.

꾀죄죄한 몰골을 지닌 소년이었다.

위곤은 짐짓 오연하게 팔짱을 낀 채 고개만 까딱여 보였다.

곧장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앞서 위곤과 실없이 대화를 나눈 백색무사가 기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인사의 답례입니까?”

“아이가 원하는 본성 무인의 모습은 대동소이한 법이지. 저거 봐라. 부친께 끌려가면서도 좋아하는 거.”

위곤은 앞으로 턱짓했다.

어느새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의 손에 뒷덜미를 잡혀 돌아가는 아이. 두 발을 질질 끌며 땅바닥에 두 줄기의 고랑을 만들고 있다.

그 소년의 부친은 누가 봐도 양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었다. 위곤과 백색무사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큰 결례를 범했다는 듯이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그렇게 멀어졌다.

익숙함 속에 공경이 있다.

이처럼 위곤을 비롯한 입황성 무인들은 지극한 격조로 여느 고관대작 못지않은 예우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하루살이들.

“저들이 정 공께 자색 등롱을 들어 보였지.”

“그랬지요.”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성대한 승단식을 치러 준 셈이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본성 무인이라면 다 같은 마음일 테지요. 누군들 제대로 된 예식을 치러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정 공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백색무사는 그렇게 말을 맺자마자 흠칫했다.

그가 맡고 있던 입황성 깃발의 건너편.

웬 사내가 성벽로를 유유자적하게 걸어오는데, 그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천잠사로 짠 게 분명한 청빛 옷자락을 큰 걸음으로 휘적휘적 들춰내는데도 그랬다.

보신경 때문이다. 무부들의 기감에 포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경지.

양어깨와 복부 정중앙에는 각각 네 개의 발톱을 지닌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조룡보(四爪龍補)다.

고금을 통틀어 손꼽히는 황권을 지닌 당대의 황제는 오조룡보(五爪龍補)를 부착한 곤룡포를 입는데, 오늘날 건릉제가 그 휘하의 번왕들에게 허락한 최고의 복식이 사조룡의(四爪龍衣)였다.

“정가 연신의 승단식은 너희가 염려할 바가 아니다.”

사내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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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촉한 유비의 피를 물려받은 것마냥 긴 귀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황상과 입황성주의 허락을 얻지 않았더냐. 승단식이야 허례허식에 불과하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날렵한 턱선과 햇볕을 또렷이 받아내는 콧대

늘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띤 미소가 돋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북경 어느 구석에서 풍류를 즐길 법한 한량과도 같은 인상이다. 사조룡의의 푸른 소맷자락을 여유롭게 펄럭이는 몸가짐도 그렇다.

하지만 행색은 달랐다.

수행원을 한 명도 대동하지 않았다.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번왕답지 않은 모습. 그는 홀로 성벽로를 거닐면서 인근을 훑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벅.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백색무사를 지나쳐 위곤에게 다가간 궁명왕이 싱긋 웃었다.

“상관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기에 기껍군. 궁명왕부의 신하들도 너희와 같다면 좋으련만.”

“왕을 뵙습니다.”

위곤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성벽의 방비를 책임지고 있는 중에는 모든 예법을 간략하게 가져가도 된다. 예를 취하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

보령창 위곤이 유별나게 고고한 것은 아니다. 입황성의 청색쯤 되면 대개 이렇다. 상대가 궁명왕 같은 주씨 절세고수라 해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이들이, 여러 대문파의 정예 고수들과 동등한 무공마저 지녔다.

굳이 나서서 예법을 지키는 인물이 드물 수밖에 없다.

궁명왕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정연신이 본성에 있을 때도 무턱대고 만남을 강권하지 않은 바 있었다.

“한잔 걸치기 좋은 날씨로군. 자고로 영웅은 말술인 법인데, 그토록 낮은 연배에 자색 옷을 입은 인물이라면 주도를 즐기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제 상관에게 듣기로, 술자리에서는 몹시 호방해진다고…….”

“율령대주 운소유 말인가? 그 친구라면 믿을 만하지. 이거 제법 기대되는군.”

궁명왕은 다소 익살스럽게 자신의 양손을 비볐다.

검 한 자루를 탄 신임 자색이 돌연 성주의 처소에서 바깥으로 쏘아져 나가던 모습.

어검비행의 추진 경파가 성내에 악영향을 줄까 염려한 것인지, 출발할 때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자연히 정연신의 갑작스런 출타를 본 이들이 많았다.

외성은 물론 본성 산하의 명문가들이 머무는 내성에서도 경종이 울렸고, 본성에 주둔하고 있던 무인들은 한바탕 전투태세를 취해야 했다.

본성의 최고 전력이 갑작스럽게 이탈한 격이니 당연했다.

그 경계 태세를 가라앉힌 자가 궁명왕이다.

금방 돌아올 듯싶으니 조용히 하라고 했다. 상단전이 발달한 절세고수 특유의 신비로운 기질을 음성에 실어내면서.

“돌아올 때가 된 듯한데…….”

뒷짐을 진 궁명왕이 성벽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보령창 위곤을 비롯한 입황성 무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굳이 애써서 예를 취하지 않을 뿐, 궁명왕 주악(朱岳)은 만인에게 어려운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연신과 궁명왕 사이에서 오고 간 논쟁에 대해 알고 있었다.

* * *

석양이 드리웠다.

정연신은 술법쟁이 둘을 격살한 뒤 양양까지 날아오면서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앞서 입황성주의 침상을 이용해 양양 인근을 모조리 훑어보고 출타한 참이었다.

악수림에게 조금이나마 승산을 점칠 수 있는 적이라곤 태모산성의 고수들뿐이다. 나머지는 돌멩이조차 되지 못한다.

지금의 양양 땅에서 세 번째로 고강한 입황제일창의 보호 아래, 무림맹회 일행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본성으로 들어올 것이다.

‘제갈청아, 현 노사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알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런데 제갈청아에게 선뜻 물어보지 못했다.

머릿속 사고의 흐름이 한껏 좁아진 채 한쪽으로만 흐르고 있었다. 마치 하늘과 교통하고 있는 그의 백회혈처럼.

‘항주.’

오직 두 글자만이 그의 뇌리에 존재했다.

꽈악.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지금의 그는 군자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을 어떻게 부수든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 능법광륜기의 막대한 소모량과 무관하게 어검비행만이 적절한 이동 수단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내공은 운기로 보충하면 돼.’

쐐애애액―!

귓전을 거세게 긁는 바람 소리와 함께 양양의 도심을 지나쳤다. 까마득한 지상에서 하나둘씩 위를 올려다보는 이들이 점으로 보였다.

거대한 성채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입황성 본성.

지금의 정연신에게도 이성은 존재했다.

본성 최고 위계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입황성 사람들이 수긍해 줘야 한다.

[이보시게, 정 공. 구태여 그리 공력을 낭비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군. 나와 더불어 대작이나 해 보지 않겠나?]

정연신은 그대로 성벽을 가로질렀다.

파공음처럼 의미 없는 말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입황성 내성으로 낙하하자마자 여뢰를 그림처럼 납검한 뒤 총관부로 향했다. 원로원주와 대총관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정 공! 제가 간이로나마 승단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중앙 연무장을 지나치기도 전에 마중을 나온 그들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신벽과 임진명.

지위가 있어 크게 내색하지는 않아도, 그들은 미미하게나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는 금방 알게 됐다.

쿵!

“수하를 잃었다기에, 내 군왕 된 도리로 최대한 자네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네만.”

묵직한 진동과 함께 정연신의 등 뒤에서 흙먼지가 파도처럼 화악 쓸려 나왔다.

“오늘은 조금 당혹스럽군. 면전에서 무시를 당해 본 경험은 처음인지라.”

묵직한 바람이 정연신과 신벽, 임진명의 의복을 흐트러뜨렸다. 보신경의 역풍이다. 착지에서 비롯된 풍압이 엄청나게 강력했다.

정연신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푸른 사조룡의를 걸친 사내가 그를 바라보며 흐리게 웃고 있었다.

궁명왕 주악. 소천무적의 일이 발생한 뒤 한 번 대면한 적 있는 인물이다. 주씨 황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로, 건릉제의 배다른 아우이기도 했다.

흐드러지게 핀 매화와 같은 자줏빛의 장포를 걸친 청년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궁명왕 전하.”

“여전히 헌앙하구만.”

궁명왕이 소탈하게 웃는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고 있었나?”

“…항주로 걸음할까 합니다.”

“또 항주로군.”

궁명왕은 주먹 쥔 손으로 과장스럽게 이마를 툭 쳤다.

이미 한 번의 대면에서 의견 충돌을 빚은 뒤, 중간에 대총관 임진명을 두고 끊임없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한 뒤였다.

그들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다.

“자네, 여기서 거기까지 가려면 이 나라의 절반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걸 아는가? 내 아까 자네에게 대작을 청했는데…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올 수 있다면 모르되, 마실을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길인 듯싶군.”

“…….”

“하남 정가의 연신.”

불현듯 궁명왕의 눈매에 날카로운 기운이 어렸다.

“너는 난세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네가 입황성에 입문한 뒤로 어떤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기근이 급속도로 퍼졌고, 그간 자리보전하고 있던 대문파의 이름난 고수들이 하나둘씩 죽어갔지. 네 행적과 난세의 확산이 일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풍스러운 언행.

정연신은 문득 어떤 사내를 떠올렸다. 모친의 죽음을 갓 태어난 아기의 탓으로 돌렸던 부친을.

“저를 탓하시는 겁니까?”

“전혀 그렇지 않네.”

갑자기 날 선 기색을 거둔 궁명왕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말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만큼 자네가 지닌 무게감이 자네의 생각 이상이란 걸세. 당장 그 검에 명을 달리한 이들의 면면을 좀 보게. 제갈가주, 모용가주, 금시문주, 십전문주, 팽가주…….”

궁명왕은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 보이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모두 천하를 움직이던 자들일세. 자네는 이제 스스로 쌓아 올린 존재감을 깨달을 필요가 있네. 부디 자각해 주게. ‘정연신’이 거하고 있는 양양과 자리를 비운 양양은 천지 차이에 가깝다는 것을.”

“저는 자리만 지키는 포대가 아닙니다.”

“포대? 그보다 더하지. 자그마치 이 나라의 검일세! 황상께서 친히 천명하신 자색의 보검! 그러한 자가 흉년을 맞이한 이 땅의 중심을 지키지 않고 동쪽 끝단으로 향한다? 누가 들어도 어불성설이라 할 걸세.”

“…동료가 사지에 있습니다.”

“내 서면으로나마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항주는 지금 절세고수들의 격전장일세. 산중 구파의 장문인들에게 맡겨도 될 일에 굳이 힘을 들일 필요가 없네. 누가 가도 그 결말을 예측하기 힘든 곳이란 말일세.”

“홀로 갈 요량입니다.”

“자색 격의 전력이 출정할 때는 마땅한 명분과 절차가 있어야 하네. 자리를 지키게. 자네가 이리 가면 양양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또한 인근의 민초들은?”

“전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

“청컨대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해 주십시오. 관아의 일은 관아도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성에게만 민생 안정의 책임을 온전히 전가하지 마십시오. 이미 무겁습니다.”

정연신이 담담하게 얘기한다.

이제 그들의 뒤편에 있던 대총관 임진명은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원로원주 신벽은 주름살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두 눈을 퉁방울만 하게 뜨고 있었다.

잠시 정연신을 멍하게 바라보던 궁명왕은 문득 입매를 양옆으로 찢으며 웃었다.

“으하, 으하하하하!”

멈추지 않는다.

마치 통렬한 공격초에 당한 것처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절대자는 한동안 넋을 놓고 웃어댔다.

“…….”

정연신은 역시 절세고수들 중 이지가 멀쩡한 인물은 자신을 비롯한 몇몇 정파의 고인들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여뢰의 검집을 향해 슬금슬금 손을 이동시킬 때쯤에야 궁명왕의 웃음이 멎었다.

“나를 부려 먹겠다고? 입황성이?”

“사지로 끌려간 제자를 외면한 문파가 몇 년이나 더 존속되겠습니까?”

“신임 자색의 기백이 터무니없구나. 궁명왕부의 노기를 받아내게 되면, 그날부로 보급에 치명적인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너 하나의 대의를 좇자고 입황성이 그런 부담을 질 리가 없다. 네가 몸담은 곳은 네 생각보다도 크고 광활한 대방파이니라.”

궁명왕의 말이 맞다.

정연신은 아직도 신검단 십칠대를 전부 본 적이 없으니까. 신검단주를 선두에 두고, 원평일검장의 흑색들이 저마다 휘하에 둔 동료들을 이끄는 광경도 마찬가지다.

꿈에서나 이뤄질까 싶은 광경을 상상해 볼 때면, 일개 방파로서는 말도 안 되는 규모가 그려지곤 했다.

“…….”

정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이토록 거대한 성을 홀로 지탱해야 하는 자색의 책임감을 새삼 실감하면서.

그때였다.

쿵.

아주 멀리서 울렸다. 외성 쪽이었다.

고개를 들자 이름과 얼굴만 알고 있는 인물의 그림자가 작게 보였다. 보령창 위곤. 정연신이 휘하에 둔 사월궁귀 위예령의 동생이라 했다.

그는 등에 맨 창이 아니라 기다란 입황성의 깃발을 쥐고 몹시 단단한 성벽로의 바닥을 두드렸다.

그 소리는 점차로 커졌다.

쿵! 쿵―!

한 명이 아니었다.

점차 여러 소리가 본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성벽로를 빙 두른 채 깃발을 내리찍고 있는 무인들 탓이었다.

그 울림은 이내 하나로 겹쳐졌다.

쿵!

크지 않은 소리였다.

쿵!

아득히 넓은 노을빛에 섞여 은은하게 땅을 진동시킬 뿐이다.

애초에 백 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 성벽을 두드린들 전장과 같은 분위기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역대를 통틀어 가장 고요한 승단식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출정식이기도 했다.

“…….”

궁명왕이 입을 다물고.

그날, 입황성은 자신들의 자색을 강호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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